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종(고려 제10대) (문단 편집) === 최후 === 정종의 재위 기간 동안 [[자연재해]]가 끊이지 않았는데 [[지진]]에 관한 기록을 보면 1035년 6월에 [[개성시|개경]]에 지진이 있었고, 8~9월에는 개경과 [[경주시|동경]] 지방 19개 주에 지진이 일어났다. 1036년 6월에는 개경, 동경, [[상주시|상주]], [[광주시|광주]], 안변부 관내 주현에서 지진이 일어나 수많은 가옥이 훼손되었고, 동경에서는 3일이 지나서야 멎었다고 한다. 뿐만 아니라 [[농업]]이 [[국가]]의 근간이었던 고려인데 비가 잘 내리지 않아 [[가뭄]]이 들어 [[하늘]]에 비를 내려달라 기도했고, 본인의 [[반찬]] 수를 줄이며 이같은 천재지변이 자신의 부덕 탓이라고 자책하여 [[죄수]]들을 석방하기도 했다. 이 때문에 [[나라]]를 이끄는 것이 부담이 되었는지 재위 12년만에 29세의 [[나이]]로 붕어했다. 이전에 정종은 자신이 붕어할 것을 예상하고, 형인 [[덕종(고려)|선군(先君)]]이 그랬듯이 동생인 [[문종(고려)|낙랑군 휘]]를 부른 뒤 유조를 통해 [[왕위]]를 넘겼고, 다음 날인 1046년 5월 18일에 붕어했다. 정종이 형인 덕종과 다르게 후사가 있었음에도 동생을 [[후계자]]로 삼은 이유는 [[태조(고려)|태조]]의 유훈을 따르는 것도 있고, 무엇보다도 문종이 그냥 [[왕족]]으로 두기 아까울 정도로 [[성군]]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. 또한 이들 [[형제]]의 형제애가 각별하고 그들이 진정으로 고려를 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.[* 실제로 후대 임금들 중 문종의 아들인 숙종은 형인 선종의 뒤를 이은 헌종을 사실상 힘으로 억눌러 퇴위시키고 왕위를 차지하기도 했다. 그나마 숙종이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명군이었다는 게 다행.] 정종은 문종에게 선위하며 이렇게 [[선언]]했다. >[[짐]](朕)은 [[덕종(고려)|선군(先君)]]의 마지막 명령(末命)을 받들어 누성(累聖)의 비도(丕圖)를 이었으니 12재(載)가 지났다. > >하늘의 돌봄 덕분에 국내(國內)가 편안했으나, 이번 계절에 들어 몸과 마음이 아프고 약석(藥石)이 무효(無效)하니 결국 대참(漸)에 이르렀다. > >바라는 것은 신기(神器)를 유덕(有德)한 자에게 돌려주는 것이다. 내사령(內史令) 낙랑군(樂浪君) 휘(徽)는 짐(朕)이 사랑하는 아우이니라. 지극한 효성과 어진 성품에 검소하고 공손해 인국(隣國)에까지 알려졌으니 마땅히 대보(大寶)를 맡아 성덕의 빛을 나타내라. >---- >《고려사》 <정종 세가> 중 정종의 유조. 《[[동문선]]》 28권에 <정왕 애책>(靖王 哀冊)[* <정왕 애책>은 후왕 문종이 형 정종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이다. 《고려사》와 비슷하게 5월 18일 정유시에 정종 용혜대왕(靖宗 容惠大王)이 [[만월대|대내(大內)]]에서 훙했다고 한다.]과 <정왕 시책문>(靖王 諡冊文)[* <정왕 시책문>은 [[문종(고려)|애사왕(哀嗣王)]]이 대행대왕(大行大王)의 묘호와 시호를 '정종 용혜대왕'으로 정했다고 고하는 글이다.]이 남아있다. 정종의 [[묘호]]가 [[시호]]로 강등된 이유는 [[원 간섭기]]에 들어서며 [[원나라]]가 '고려 [[천자]]의 묘호가 참람하다'는 이유로 시호를 낮추어버렸기 때문이다.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고려 10대 정종 주릉.jpg|width=100%]]}}} || || '''{{{#670000 주릉 전경}}}''' {{{-2 정종의 [[무덤]]인 '[[주릉]]'은 2016년 형인 덕종의 [[숙릉]] 근처에서 발굴되었다.}}} ||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